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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현대 철학의 욕망의 윤리: 로버트 브라우닝의 My Last Duchess를 통한 초월의 윤리학 2014/06/20 16:03 by 조현수

현대 철학의 욕망의 윤리: 로버트 브라우닝의
My Last Duchess
를 통한 초월의 윤리학
  

데리다(Jacques Derrida)와 라캉(Jackques Lacan) 같은 현대 탈구조주의 사상가들은 주체로부터 진정한 바깥, 주체성의 외부, 즉 타자(the Other)에 대한 연구를 위해 노력했다. 그들에게 예술과 문학이란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주체성의 바깥으로 이끌어주는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Lee, “Sensing” 128). 탈구조주의 비평가들은 전통적인 이론가들과는 달리 특정한 예술 작품이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반대로 그동안 진리라고 여겨졌던 가치들의 환상을 드러냈다. 이와 같은 탈구조주의적 관점을 통해 확인된 것은 과거의 이성중심주의를 통해 대상의 진리와 본질이라고 여겨졌던 것이 결코 인간의 이성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초월적 진리라고 여겨졌던 것들은 결국 인간 이성을 통해 재구성된 그들 자신의 사유라는 인식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와 같이 환원주의적 인간 이성에 의해서도 포섭될 수 없는 것을 절대적 타자(the absolute other)라고 부른다. 근대 이후의 사유는 이 환원 불가능한 타자성이 문학을 통해서 인지되는 과정과 원리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결정적으로 자크 데리다의 이론은 문학 작품이 본래적 의미와 진리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 온 기존 연구자들의 시각에 전환점을 가져왔고, 기존의 관점과 같이 절대적 의미란 주요하거나 근본적이지 않고 초월적이지도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Derrida 22). 그는 언제나 철학을 문학이나 인문학에 녹아내려고 고군분투했는데 (Caputo 56), 사유와 이성, 나아가 그것을 행하는 인간 자체에 대한 학문인 철학과 더불어 문학 또한 그것의 언어적 양식을 통해 그 구조를 초월한 영역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주체의 사유가 가능하게 해주는 언어적 구조를 양식으로 삼기 때문에 문학은 그것을 대상으로 사유하게 되는 주체에게 직접적으로 체험된다. 그러므로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목적을 가진 역사적 기술이나 기록과는 다르게, 문학의 효과는 독자로 하여금 어떤 감정을 일으키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 감정은 슬픔, 기쁨, 분노로는 표현되지 않는 대상과의 마주침을 통해 느껴진다.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의 시는 직접적으로 예술과 관련된 주제나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에, 이와 같은 주제와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독자를 경험 너머로 이끌어 가는 문학의 기능에 대해 논의할 수 있도록 돕는다. 브라우닝의 작품 속에는 종종 예술을 감상하는 인물이나 직접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가 등장하여 그들이 가진 예술에 대한 관점과 삶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이야기 하는데, 그의 시 중 “My Last Duchess”는 예술,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림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시의 서술자가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관점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시를 감상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생생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본 글에서는 이처럼 “My Last Duchess”가 예술에 관한 작 중 인물의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 이것이 어떻게 독자의 유한성 너머의 영역을 느낄 수 있도록 기능하는지 논의할 것이다. 이를 위해 라캉의 응시(gaze)와 데리다의 존재(being)에 관한 논의를 통해 시를 읽고, 작품에서 나타나는 주체의 환원적 욕망과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생겨나는 불확실성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상징체제로는 포섭되지 않는 불확실성을 통해서 절대적 타자(the absolute other)와 마주치게 되는, 이 순간적인 기이함을 경험하는 것은 주체로 하여금 자신의 완전한 외부에 있는 초월성의 존재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며, 이것을 인지하면서 자신의 사유가 행하고 있던 환원적 태도에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독자는 “My Last Duchess”에서 새로운 부인이 될 가문에서 보낸 사자(使者)에게 자신이 소유한 전 부인의 초상화에 대해 말하고 있는 페레라의 공작(Duke of Ferrera)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공작이 계속해서 이야기 하는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당사자의 목소리는 완전히 배재된 채 공작의 의견만 계속해서 서술되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는 공작에게 일방적으로 그 그림과 공작부인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자기 자신과 공작부인에 대한 공작의 관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는 “900년 전통 가문인 나의 선물”(My gift of a nine-hundred-years-old name)이 단지 그 전통 때문에 다른 이들의 선물보다 가치가 있어야 함을 언급하며, 오랜 전통을 가진 가문의 후손이라는 점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고 이는 그의 오만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자존감 높은 그의 태도는 특히 그림을 설명해주는 어투와 태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공작은 자신이 소유한 공작부인의 초상화의 소유권을 강조하면서, 마치 그 그림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공작부인이 가진 아름다움의 본질 또한 모두 이해하고 소유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림에 대한 소유권을 강조하는 그의 태도는, 그림을 가린 커튼에 대해 당신을 위해 걷은 그 커튼은 나[공작] 이외엔 그 누구도 건들지 못하지만 나만이 할 수 있다오”(none puts by the curtain I have drawn for you, but I)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초상화의 물리적 소유를 이성을 통한 완전한 이해로 이어가며 공작부인과 초상화에 대한 주인의 입장을 논한다.

공작은 자신의 저택을 방문한 사신에게 단순히 그림이 그려진 배경이나 공작부인과의 기억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가진 미학적인 아름다움까지 해석하여 그에 대해 설명하길 시도한다. 또한 그는 그림의 미적 가치를 이해하거나 포착하지 못하는 손님들의 부족한 미적 감각을 불평하고, 반대로 그것을 타인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는 자신의 미적 교양을 뽐내고 있다. 다음 인용을 통해,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며 초상화에 대한 물리적, 정신적 소유욕을 표현하는 공작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녀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네.

난 이제 이 작품을 아주 경이롭다 그러지.

. . .

여기 앉아 그녀를 보지 않겠소?

판돌프 수사가 그렸다 했소.

당신 같은 외부인들은 그림의 표정

그 깊이와 그림의 진정한 광채가 가진 열정을 읽어내기 힘들기 때문이지.

그러나 그들은 나를 향해 돌아서서는

. . .

감히 내게 뭔가 묻는 것 같았지.

어떻게 그림에서 그런 광채가 날 수 있었는지 말이야.

그러니 돌아서서 그것을 물은 게 자네가 처음은 아니란 거지.

 

Looking as if she were alive. I call

That piece a wonder, now:

. . .

Will’t please you sit and look at her? I said

“Fra Pandolf” by design, for never read

Strangers like you that pictured countenance,

The depth and passion of its earnest glance,

But to myself they turned

. . .

And seemed as they would ask me, if they durst,

How such a glance came there; so, not the first

Are you to turn and ask thus.

 

살아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초상화의 생동감과 그림 속 공작부인의 아름대움에 대해 감탄하는 공작의 태도는 단순히 그에 대한 찬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가치를 알아차릴 수 있는 식견은 오직 공작 자신에게만 있다는 것을 주장하며, “당신 같은 외부인들은 그림의 표정, 그 깊이와 그림의 진정한 광채가 가진 열정을 읽어내기 힘들기 때문에”(Strangers like you that pictured countenance, The depth and passion of its earnest glance), 함께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 그림이 가진 아름다움과 가치의 원천에 대해 무례하게도 공작에게 물어왔으나 그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공작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자 자격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공작 자신은 공작부인의 초상화에 대해 누구에게든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알고 있으며, 그것이 가진 미적 가치에 대해서도 그 근원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다고 여기지만 여전히 예술작품으로서 초상화의 본질이 가진 불확실성은 공작의 이해 너머의 것으로 남아있다. 시에서 공작은 그림에 대해 단호한 어조로 말하지만 또한 자신이 말하고자하는 이야기에 반복적으로 불확실성을 부여한다. 예를 들어 그는 공작부인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말해야 할까?”(how shall I say?), 혹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I know not how)이라고 말하며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더욱이 이런 태도는 언제나 이야기하고 있는 문장 가운데 삽입되면서 단호한 공작의 태도와 상반되는 불확실성을 부각시킨다.

이렇게 “My Last Duchess”에서 유럽의 오랜 전통과 지적 권위를 대변하는 공작을 통해 역설적으로 발현되는 이 불확실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시에서는 공작이 공작부인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타자에 대한 환원이 경험적으로 재현되는데, 응시에 대한 라캉의 논의를 살펴보는 것은 공작이 가진 시선의 환원적 체계를 분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응시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주체성의 본질이라는 문제와 직결되는데, 라캉에게 있어 주체란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을 요구하는 주체다. 라캉은 어떤 실체적인, 주체에 속하는 시선으로서 대상을 바라보는 행위와 그 대상 이외에 이 둘에 속하지 않는 응시에 주목한다. 응시는 눈을 통해 경험적으로 바라보는 시선과는 구분되며, 오히려 응시로부터 파생된다 (윤일환 122). 응시는 의식의 주체가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그 대상이 주체를 바라보는 것도 아닌데, 응시는 의식의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 즉 이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징질서의 성립에 개입하고 그 상징질서로는 표현되지 않는 실재로부터 이 관계를 바라본다. 주체는 자신의 사유를 통해 대상을 판단하는데 있어, 이 응시로부터 일종의 승인을 바라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유의 불확실성에서 욕망이 생산된다. 그러나 응시는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타자의 승인, 인정은 주체에게 경험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즉 주체를 성립하기 위한 사유는 주체를 응시하는 타자의 인정을 요구하나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이 과정은 끊임없이 연기되고 주체성은 불완전한 상태로 그 결여의 보완을 끊임없이 욕망한다.

주체의 사유는 기호를 통한 상징체계를 통해 조건 지어 지는데, 이 상징체계로 재현되지 않는 곳으로부터의 응시는 그것의 비실체성 때문에 주체의 사유 내부로 환원시킬 수 없다. 여기서 환원 불가능한 절대적 타자의 응시는 주체성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구멍을 만들어내는데, 주체는 이 구멍, 주체성에 생겨나는 결여(lack)를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욕망한다. 그러나 다시 말해서 주체가 자신이 사유하는 상징체계 안에 존재하는 한 이 간극은 메워질 수 없다.

상징체계 내부에 놓은 주체성의 불완전성은 여전히 그 외부의 타자성의 발견을 가능하게 해주고, 상징질서의 극복을 통해 완전한 주체성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 “My Last Duchess”의 공작은 공작부인의 초상화를 감상하는 가운데 언어적 상징체계의 불확실성을 경험하지만, 자리를 옮기며 눈에 들어온 넵튠상()에 대해 초상화 감상에서 보여줬던 주체의 환원적 사유를 반복한다. 자랑스럽게 넵튠상을 소개하는 공작의 모습과 함께 시는 끝나는데, 대상을 주체성 내부로 포섭하길 시도하는 그의 태도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이 과정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독자가 주목해야할 점은 단순히 공작을 통해 비춰지는 주체성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대한 비판이나 그것이 가진 상징성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로인해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불확정성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포섭 불가능한 영역 자체이다.

주체성에 뚫린 구멍은 사유와 시각의 대상을 주체성 안으로 빨아들이는데, 이 환원주의를 멈출 수 있는 첫 번째 단계는 주체성의 결여를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것이다. 주체성의 불완전성을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주체로 포섭 불가능한 불확정성과 마주치는 것인데, 이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 특히 언어로 된 예술인 문학작품이다. “My Last Duchess”의 서술자가 반복하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라는 화두는 시를 감상하는 독자의 사유에 구멍을 내어 일차적으로는 욕망의 체계를 작동시키며, 또한 그 이후에도 구멍에 빨려 들어가지 않고 남게 되는, 즉 사유의 체계 자체를 벗어나 욕망을 작동시키는 존재를 인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주체의 불완전성과 구멍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 발견되는 것은 끊임없이 욕망하는 주체의 환원주의 자체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계속해서 세계를 상징구조 내부로 포섭하는, 이 욕망하는 주체는 그 구조를 견고하게 만드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 환원주의 자체도 노출시킨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언어체계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불확실성이 주체에게 단지 구조적으로 사유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감정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정 불가능한 불확실성, 혹은 환원되지 않는 절대적 타자와 맞닥뜨리는 것은 주체성의 결여, 즉 완전성에 대한 위협 또는 주체의 유한성을 인정하게 되는 계기이기 때문에 공포나 고통을 유발한다. 이 고통은 주체 스스로 감수하는 것이 아니며 불확실성과의 조우를 통해 알아차리게 되는 타자성, 즉 주체성 외부로부터 주어질 뿐이다. 그리고 이 고통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주체는 비로소 윤리적일 수 있다 (Levinas 49-51).

본 글은 데리다, 라캉, 레비나스라는 상이한 이론가들을 통해 “My Last Duchess”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윤리성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 내었는데, 이들 모두가 상징질서로 재현되지 않는 초월성의 추구를 직접적으로 논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이들 모두 지양했던 것은, 주체성 내부에서 절대적 사유를 가능하도록 하는 근원을 찾고자 했던 전통적 철학의 자발성(spontaneity)이 가진 한계다. 로버트 브라우닝은 자신의 시에 등장하는 공작의 태도를 통해 주체의 자발적 사유와 그 한계를 표현해내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알 수 없는 완전한 외부를 느낄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는, 문학이 주체성 외부의 초월적 영역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해주지만 그것이 상징체계를 이루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이에 대해 묘사하거나 독자를 이끌어 갈 수는 없다는 점이다. 단지 문학은 초월성에 대한 순간적 경험을 통해 주체성을 구멍이 난 상태 이전, 즉 상징질서로의 편입 이전의 완전한 자유를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이를 통해 주체는 욕망의 충족이 아닌 그 욕망 자체를 지워버림으로써 초월적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Works Cited  

윤일환. 시각의 지울 수 없는 얼룩: 라캉의 응시의 위상학. 『한국비평이론학회』9.1 (2004): 117-56.

Caputo, John D. ed. Deconstruction in a nut shell: A Conversation with Jacques Derrida. New York: Fordham UP. 1997. Print.

Derrida, Jacques. Of Grammatology. 1976. Trans. Gayatri Spivak. Baltimore: Johns Hopkins UP. 1997. Print.

Lee. Jaeseong. “Sensing Being-Such As Emptiness through Literary Reading: Jean Luc-Nancy’s Aesthetics and Mahayana Buddhist Philosophy.” 『새한영어영문학』55.3 (2013): 127-47. Print.

Levinas, Emmanuel. Otherwise Than Being or Beyond Essence. Trans. Alphonso Lingis. Dordrecht: Kluwer, 1991. Print.


덧글

  • 조현수 2014/06/20 16:20 # 답글

    논문때문에 바빠서 급하게 막 썼더니 웬 A4 다섯 페이지짜리 똥이 탄생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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